[리뷰] 영화 캐롤

영화 얘기니까 당연히 줄거리나 소재가 들어갑니다. 

메모수준의 사용기라 말이 짧습니다. 미리 양해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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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온리 퀴어영화만 보는 건 아닌데, 최근 본 가장 훌륭한 영화들은 모두 퀴어영화다. 신기해...



서구권의 문화적 특징인지 몰라도, 모든 사랑은 시선에서 시작된다.
두 여자는 한 공간에서 서로를 훔쳐보고, 눈을 맞추고 다가간다. 정말 별 거 아닌 순간들인데, 이런 게 중첩되면서 그들 사이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호감이 느껴진다.
영화의 의상과 미술이 무척이나 훌륭하다.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거의 모든 돈을 거기다 쏟아부은 느낌이다.

케이트 블란쳇이야 연기로는 이미 대가취급인데 이 영화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루니 마라다. 어딘가 소심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천천히 사랑을 받아들이며 젖어드는 모습을 정말 빼어나게 표현한다. 특히 엔딩장면의 오크룸에서 캐롤을 찾으며 보여주는 눈빛을 보며 '아~'하고 탄성을 뱉었다. 나까지 캐롤을 함께 찾으며 기대, 긴장, 두려움, 슬픔, 기쁨까지 함께 느끼게 만들었다.

주변 반응에서 느낀 건데 멜로영화의 감정선을 헤아리는 건 마치, <본시리즈>의 액션장면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쉽게 탁탁 이해되는데, 누구는 잘 안된다. 나만 봐도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카체이싱 장면에서 본의 운전을 멍하게 보는데 그쪽 좋아하는 친구는 무릎을 치며 끝내준다고 칭찬했었다. 마찬가지로 <콜·바·넴>이나 <신의 나라>, <캐롤>을 보며 대체 주인공들이 언제부터 서로를 좋아한 거야? 라며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을 곧잘 봤다. 나로서는 '응?? 어떻게 모르지?'하다가도 또 장면들을 보면 직접적인 대사도 없고, 은근뭉근해서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근데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다 훈련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능하다. 훈련이란 말이 무슨 억지로 해야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는데, 그냥 자주 즐기다 보면 누구나 금세 알아먹게 된다.

개인적으로 두 주인공의 첫 식사장면에서 숨이 막혔다. 케이트 블란쳇이 만들어내는 농염한 분위기, 루니 마라의 풋풋하면서도 어리숙한 호감이 어우려져서 스프를 숟가락으로 뜨는데 속으로 '어우- 수위가 너무 쎈데...' 했다.  오히려 첫 동침장면에서 긴장감이 해소되니 약간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노련한 중년 여성이 등장하는 만큼 성적긴장감의 수위가 보통 멜로드라마보다 훨씬 높다. 거기다 두 주인공이 모두 여성인지라 전체적으로 매우 우아한다. 뭐랄까... 아주 진한 부야베스(안먹어봄.. 상상한 거임...)랑 비슷하지 않을까? 바꿔말하면 상큼발랄하다던지, 에너지가 막 넘친다던지 하는 느낌은 아니다. <콜·바·넴>따위는 <캐롤>에 대면 풋내기들 소꼽장난같고, <신의 나라>는 축사(지저분한 동물 우리...)처럼 보일 지경이다. 화면에서 향수냄새가 뿜어져나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니 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두 여배우의 노출이 불공평하다는 거다. 섹스씬에서 서로에게 똑같이 모든 걸 준다는 느낌이 안들기 때문이다. 두 여성이 현실에서의 사회적 제약, 신분, 규칙을 깨고 마주하는 건데, 한쪽만 노출이 있어서 그런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다.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안놓고 있던 덕에 이렇게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졌으니 영화 외적으로는 이해한다...



구글 플레이무비에서 소장용으로 천원에 구매했는데 매우 만족스럽다.
극장에서 봤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차피 늦었으니...
이 영화는 정말 안주영화다! 아.. 말이 너무 천박한가... 술이랑 정말 잘 어울리는 영화다. 향이 진하고 달콤하면서, 도수가 좀 높은 술이면 좋을거 같다. 특히나 퀴어로맨스니까 마음 속 벽을 허물고 포용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살짝 알딸딸해지는 게 좋을 듯.
그나저나 이 정도면 토드 헤인즈도 거장급 아닌가? <파 프롬 헤븐>도 정말 놀라웠는데...
진한 멜로 영화 없냐고 누가 물어보면 주저없이 권하고 싶다.

 



June 30, 2018 at 05:12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