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소박하고 맛있는 멸치국수와 냉열무국수 - 명륜동 성대국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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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가장 핫한 면 요리를 꼽으라면 역시 평양냉면이 아닐까 싶다. 사실 평양냉면이 미식가들의 핫 아이템이 된 것이 근간의 일은 아니지만, 올해에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가게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것 때문인지 유독 그 열기가 뜨겁다.() 또한 평양냉면은 좋아하기도 하고 자주 먹기도 한다. 단지 여름에만 먹는 게 아니고, 서울시내 중심가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어서, 사시사철 냉면 생각이 간절해지면 가까운 우래옥이나 을지면옥, 필동면옥, 장충동 평양면옥 등을 찾아 은은한 메밀향과 밍밍한 듯 감칠맛 나는 육수를 들이켠다.

 

순도 높은 메밀면, 고기를 담뿍 넣고 우려내는 육수만 놓고 보아도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제대로 만든 평양냉면은 상당한 고급 음식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작금의 인기를 고려하면 한 그릇에 1~12000원을 호가하는 가격도 그리 비싼 게 아닐지 모른다. 물론 수년 전만 해도 비싸야 7000~9000원이요, 조금 서민적인 식당에서는 4000~5000원에도 맛볼 수 있었던 음식이었음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인상폭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고오급 레스토랑에서 파스타 한 그릇에 13000~25000원도 받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일류로 평가받는 가게에서 단돈 12000원으로 최고의 맛을 즐길 수 있는 평양냉면의 가격은 오히려 합리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해도, 자그마한 개인기업의 만년과장인 여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평양냉면은 역시 부담스러운 음식이다. 꽤나 큰맘 먹고 부려야 하는 사치다. 남대문시장의 부원면옥이나 종로3가의 유진식당(7000), 역시 종로3가의 선비옥(5000)처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개성적인 평양냉면을 즐길 수 있는 곳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맛의 밸런스나 면의 질감에 있어서는 소위 일류라 불리는 가게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정말 주머니가 가벼운데 평양냉면이 절실할 때라면 모를까, 꼭 냉면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여는 명동할머니국수 등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소면을 즐길 수 있는 가게를 찾곤 한다.

 

지금은 직장에서 가까운 명동할머니국수를 즐겨 찾지만, 예전에 대학로 쪽에서 근무하던 때에는 성균관대학교 앞의 자그마한 국수가게 성대국수를 자주 찾았다. 여가 삼십대 중후반을 온전히 보낸 대학로 시절의 후반기는 지극히 힘든 시기였다. 백만 원 남짓한 월급조차 보름씩 밀리기를 밥 먹듯 했고, 통장에도 주머니에도 항상 돈이 부족했다. 성균관대학교 명륜캠퍼스가 가까워서, 학교 앞으로 가면 저렴한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많아 다행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원고 뭉치를 붙들고 있다가 느지막이 퇴근하여 삼사천 원짜리 멸치국수, 냉열무국수로 주린 속을 달래노라면 인생이 고달프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담백하고 맛있는 국수를 적은 돈으로 먹을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하기도 했다. 천우신조로 조금 더 나은 직장으로 옮겨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소면을 먹으면 그때 생각이 나 쓴웃음을 짓곤 한다.

 

며칠 전, 모처럼 대학로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홀로 어딘가를 들르면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스케줄이었다. 퇴근하자마자 대학로로 이동하여 한 시간 여 만에 예정했던 일을 마친 여는 요즘 대학로에서 유명한 먹거리가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정한 곳도 없이 허위허위 먹자골목을 헤매었다. 기억 속의 많은 가게들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생경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정겨운 가게들이 간혹 눈에 띄었지만 혼밥에는 적합하지 못한 메뉴들이라 그냥 지나쳤고, 대학 시절부터 대학로 시절까지 오래도록 단골이었던 ‘88떡볶이가 남아 있는 것은 진정 반가웠으나 중년 아재의 늦은 저녁 메뉴로 삼기에는 뱃속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대앞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하염없이 걷던 여의 시선은 좁은 골목을 환히 밝히고 있는 노란 백열등 불빛에 불현듯 사로잡혔다. 성대국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여는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 할머니도 따님도 그대로셨고, 멸치국수와 냉열무국수, 어묵 등 메뉴도 그대로였다. 그리운 듯 얼떨떨한 듯 예전에 항상 앉던 길바닥 의자에 앉으려 하자 주인 할머니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거셨다.

 

날도 더운데 안쪽으로 앉으세요.”

?, 안쪽이 생겼군요.”

 

보니, 전에는 길바닥에 동그란 의자 몇 개를 놓고 장사했던 가게가 건물 안쪽으로 널찍하게 확장되어 있었다. 인테리어나 분위기는 바깥이나 다름없이 단출하지만, 역시 바깥이나 다름없이 단순하고 깔끔한 내부에 마음이 편해졌다.

 

참 오랜만에 왔습니다. 냉열무국수 하나 주세요.”

 

손녀인 듯한 어린 학생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주인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조금 올랐다. 주력 메뉴인 멸치국수가 4000, 비빔국수와 냉열무국수가 4500원이다. 토종순대는 3000, 부산어묵은 1000. 약간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부담 없는 가격이다. 잠시 추억을 더듬고 있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소복하게 담긴 냉열무국수 그릇과 멸치국수 국물이 나온다. 숟가락을 들어 작은 그릇에 제공된 멸치국수 국물을 맛본다. 과하지 않은, 그렇지만 심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염도의 감칠맛 나는 국물이 여의 혀를 휘감는다. 예전에 즐겨 먹던 그 맛 그대로다. 변하지 않은 것은 가격만이 아닌 셈이다.

 

숟가락을 옮겨 차가운 열무김치 국물을 맛보고, 젓가락을 들어 열무를 한 점 맛본다. 단돈 4500원에 이만한 열무국수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 좋은 일이다. 자극적으로 맵거나 짜지 않으며 딱 적당한 맛이 나는 것은 멸치국수와 다름이 없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겠지만, 여가 생각하기에 성대국수 누가 와서 먹더라도 과하게 강하거나 약하지 않은 적당함의 매력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소박하고 서민적인 음식이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더 기본의 차이가 도드라진다.

 

열무와 오이, 무 고명을 휘휘 저어 국수와 섞은 다음 크게 한 젓갈을 집어 입으로 옮긴다. 아삭한 고명의 식감과 적당히 무른 듯하면서도 살짝 탄력이 남도록 삶아낸 소면의 식감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전혀 무뎌지지 않았구나. 세월과 풍상에 둔해진 내 혀도 그리운 이 맛은 결코 잊지 않았구나. 작은 기쁨을 느끼며 여는 단순해서 더 맛깔난 국수 한 그릇을 빠르게 비워내었다. 살짝 얼얼해진 혀를 따스한 멸치국수 국물로 마저 달래고, 계산을 마치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드리며 밤거리로 나섰다.

 

온라인에 음식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다양한 커뮤니티와 SNS에는 쉴 새 없이 맛집 정보가 공유되고, 음식에 대한 예의를 차리며 정성스레 촬영한 인증 사진들도 수시로 올라온다. 실제로 요즘 사람들의 맛에 대한 식견은 예전에 비할 바 없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하지만 매스미디어와 온라인 콘텐츠의 힘도 급속히 커졌다.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메뉴에는 전문가도 불편러도 넘쳐나지만, 그렇지 못한 메뉴는 왠지 소외되고 홀대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혹시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밤 늦게 따끈한 우동(소면도 그냥 이렇게 부르곤 했다) 한 그릇을 비웠던 기억이 떠오른다면, 예전에 비해 잘하는 가게를 찾기가 힘들어진 멸치국수나 열무국수의 맛이 갑자기 그리워진다면, 해 저문 저녁시간에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으로 가 보시기를. 누구나 엄지를 세울 만큰 대단한 맛집은 아니지만, 좁은 골목에 입구로 새어 나오는 따스한 불빛과 잘 말아낸 한 그릇의 소면이 어쩌면 오래도록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단편이 될지 모르오니.



June 30, 2016 at 01:33AM